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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1차 세계대전의 기록

A형 백수 2018. 6. 23. 11:23

[스크랩] 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



작성자:이영애씨작성시간:2018.06.15  조회수: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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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목록
1)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마른 전투(1914)
2) 1차 이프르 전투: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1914)
3) 1915년의 서부 전선: 무시무시한 독가스의 등장
4) 베르됭 전투 : 1차 대전 최악의 전투(1916)
5)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1916)

6) 동부 전선: 탄넨베르크 전투(1914)




전쟁에 대한 착각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이상 전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도 전쟁이 벌어질 경우 외교적으로 선전포고라는 요식 행위를 벌이지만 전쟁을 선포하는 측이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대개 기습 직전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을 벌이기로 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무엇보다 군사적 이점이 큰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소집령에 의거, 동원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사들이 자신만만하게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하여도 준비도 갖추지 않은 상대를 기습 공격하는 행위를 명예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5일 후인 7월 28일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세르비아도 충분히 마음을 먹고 어느 정도 전쟁할 준비를 갖추고 있던 상태였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체면치레였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처럼 나름대로 형식을 갖추어 전쟁을 치르려 하였다.


살육과 파괴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 전쟁의 잔인함을 제대로 예견하지 못하였기에 벌어진 착각이었다. 특히 보불전쟁 이후 지난 40년 동안 유럽에서 강대국 간에 충돌이 없었기에 전쟁의 무서움을 시나브로 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은 두 나라 사이에서만 벌어져야 할 전쟁이 불과 한달도 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전하는 거대한 블랙홀로 변하도록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보불전쟁 당시인 1870년 메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프랑스군)


치열한 제국주의 팽창 경쟁으로 말미암아 전쟁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였다면 판이 커져서 1차 대전으로까지 증폭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삼국동맹이니 삼국협상이니 혹은 쌍방 간 비밀 협약이니 하는 것 등으로 참전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쉽게 전쟁에 뛰어든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쟁을 쉽게 생각하였다는 증거다.




누구나 뛰어들고 싶었던 전쟁


직접 전쟁을 결정하는 권력자나 집권 세력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교육계처럼 사회를 선도하는 계층은 물론 어쩌면 전쟁으로 인해 가장 어려움을 겪을 대상인 보통 사람들도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전쟁을 선언했을 때 환호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동안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립이 극심하였던 독일,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즉각 정쟁이 중단되고 전선으로 앞 다투어 달려 나가려 했을 정도였다.


전 유럽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이런 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광기 이외의 단어는 떠올리지 못할 정도다. 유럽에서 30년 평화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가 쓰여진 이래 유럽에서 전쟁은 일상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대부분의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졌고 싸움은 군인만 하는 것이기에 정작 전쟁의 무서움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매스컴이나 영상 자료가 발달되지 못하여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힘들었다.


1차 대전의 원인을 살펴보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갈등을 해결 보려 하였을 정도로 이미 대립이 극심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모로코 사건과 발칸 전쟁에서 보듯이 강대국 간의 직접 충돌을 자제하려는 모습은 당시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길로 들어서자 직접적인 이해가 얽히지 않은 많은 나라들의 참전까지 뒤를 이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열린 거대한 도박판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부 영화를 보면 술집에서 주인공이 싸움을 하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흔하게 묘사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향해 포격을 시작하였을 당시의 유럽이 마치 그러하였다. 이렇게 싸움이 벌어지자 전쟁터 주변에 있던 나라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그러한 나라들 중에는 한 때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만 제국(이하 오스만)도 있었다.




노쇠한 제국의 참전


앞에서 1차 대전의 비이성적인 시작 모습을 언급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보호하거나 쟁취할 이익이 없다면 결코 전쟁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어처구니없이 판이 커져 갔지만 그렇게 된 이유에는 이처럼 전쟁을 통해서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더불어 이익을 챙기려 하였던 욕구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1914년 11월 1일, 오스만이 동맹국 가담을 선언하며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914년 11월 1일 성직자(Shaykh al-Islām)가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하는 오스만)


16세기 절정기 당시의 오스만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초강대국으로 군림하였지만 어느덧 19세기에 들어 유럽 측으로부터 빈사 상태인 환자라고 불리는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을 만큼 국력이 쇠퇴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의 안위를 위협하는 가장 위협적인 적대 세력이었다. 엄밀히 말해 유럽과 오스만의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 들어서 오스만은 자신들의 외곽인 중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사이가 나빴다. 하지만 단지 이 때문에 오스만이 동맹국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고 크림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편에 서서 싸우기도 하였다. 오히려 1차 대전 참전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같은 편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 사이가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전쟁 말기인 1917년 10월 15일,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를 환영하는 오스만의 술탄 메흐멧 5세)


발칸 반도의 이해 관계를 놓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벌인 대립은 수백년에 이를 만큼 뿌리가 깊었고 불가리아는 불과 2년 전에 있었던 1차 발칸 전쟁 당시에 오스만을 몰아붙인 발칸 동맹의 당사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 동맹국을 결성하기로 한 것은 한마디로 그쪽 편에 붙어 싸우면 나중에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많을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편에 붙어야 하나




(20세기 초 중근동으로 세력 확대를 노리던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구상(이른바 3B 정책)하였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다.)


1차 대전이 개시되자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와 흑해를 거쳐 러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오스만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따라서 연합국 측에서도 오스만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많은 회유책과 더불어 군함을 파견하여 압박을 가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전쟁 이전부터 외교적, 군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다져 놓았던 독일도 당연히 영향력 확대에 힘을 썼다.


이런 국제 상황에 발맞추어 오스만 내부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인지 참전할 것인지, 만일 전쟁에 뛰어든다면 어느 편에 붙어서 싸울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주로 관망하자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1914년 8월 2일 오스만과 독일이 연합 협정을 맺은 후 동원령이 선포되고 독일 군사 고문단이 오스만군을 실질적으로 지휘 하였음에도 오스만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을 정도였다.


반면 오스만 역사 상 처음으로 유럽 각국 모두가 같은 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로 이때 적극 참전하여 실지 회복처럼 실리를 취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 붙어 싸움을 벌이는가가 문제였는데, 사실 오스만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국가는 없었다. 물론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은 낯선 것이 아니지만 기독교 문명권에서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은 여전히 경원시 되던 상대였다.


당연히 이를 잘 아는 오스만도 전쟁에 뛰어든다면 가장 위협적인 상대를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림 전쟁 이후 카프카스를 거쳐 이라크로 남하를 시도하고 한편으로 발칸 반도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가 오스만에게는 당장의 눈엣가시였다. 러시아와 싸운다면 영국, 프랑스와도 적이 되어야 했고 반면 사이가 나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같은 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익을 취하려는데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넓어진 전쟁터


오스만이 동맹국에 전격 가담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역할이 컸다. 독일은 일단 지리적으로 멀었고 또한 1871년에야 겨우 통일을 이루었기에 오스만과 직접적으로 이해타산이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뒤늦게 제국주의 팽창 대열에 동참한 독일은 전략적으로 오스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스만 또한 그 동안 툭하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독일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편했다.


양측의 꾸준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아직 참전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독일은 오스만군 지휘에 깊숙이 개입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8월 10일 지중해에서 작전을 벌이던 독일 해군의 괴벤(SMS Goeben)과 브레슬라우(SMS Breslau)가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해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으로 들어온 후 독일 해군이 실질적으로 오스만 해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스만은 대외적으로 중립임을 표명하였다.




(이스탄불 인근 이스티녜 만에 정박 중인 독일의 순양전함 괴벤)


하지만 연합군과 교전만 벌이지 않았다 뿐이지 이런 관계라면 오스만의 시계추는 이미 동맹국 측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마침내 1914년 11월 1일 전쟁 참가에 적극적이었던 권력 실세이자 국방장관인 엔베르 파샤(Enver Paşa)의 주도로 오스만은 지하드(성전)라는 명목으로 연합군에게 전쟁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오스만의 입장이 정확히 파악되자 러시아를 필두로 영국과 프랑스가 곧바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 1차 대전은 중동으로까지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오스만과 러시아가 접한 카프카스에 새로운 전선이 생겨났고 중동 일대에서 식민지 경영에 힘쓰던 영국, 프랑스와 오래 전부터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어쩌면 그동안 신중하였던 오스만이 동맹국에 가담하였던 이유 중 하나가 이때까지의 전황만 본다면 동맹국에 유리한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해서 나온 오판


사실 1914년 말까지만 해도 이 전쟁이 앞으로 4년간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따라서 먼 앞날의 일보다 당장의 전황이 오스만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오스만은 이번 기회에 러시아를 카프카스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중동에서 완전히 몰아내면 17세기 이후 서서히 잃어가던 제국의 위엄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오스만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면서 제일 먼저 자기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다. 아나톨리아(Anatolia)와 갈리폴리(Gallipoli) 반도 사이에 놓여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병목 지점으로 이곳이 막히자 러시아와 영국을 바다로 연결하여 주던 주요 통로 중 하나가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이제 서부 전선의 영국, 프랑스와 동부 전선의 러시아를 연계하는 통로는 북해만 남게 되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유일 통로다. 그 중 갈리폴리 반도는 이곳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이다.)


조급해진 영국은 길목을 막고 있던 오스만을 분쇄할 계획을 입안하였다. 내각에서 일사천리로 승인된 작전의 골자는 영불연합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심장인 이스탄불로 직접 진격하는 것으로 입안자는 해군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쇠하였어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쳐 600여년을 호령하던 오스만의 잠재력을 처칠은 너무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엄청났다.


피로 얼룩진 갈리폴리 전투는 이렇게 오판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1차 대전 당시의 여타 전선과 비교하여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서부 전선의 지옥과 같았던 여러 전투에 비교하여 그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부 전선에서의 피해가 경악할 수준이어서 그런 것이지 중근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도 결코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치열하였다.




비극의 서막


영국이 작전을 성공하려면 다르다넬스 해협 양편에 전개된 오스만의 해안 포대와 요새들을 함포 사격으로 사전에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병력이 상륙하여 점령하여야 했다. 당연히 거점을 장악할 육군이 투입되어야 하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처칠은 육군의 참여를 처음부터 무시하였다. 그는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의 화력만으로도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는 만용을 부렸다.


1915년 2월 19일 영불 연합함대의 전함들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역사적 전투는 막이 올랐다. 연합군은 오스만 앞바다를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닐 자신은 있었지만 육지의 목표를 점령하여야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처칠은 마치 식민지 개척 당시에 함포를 몇방만 쏘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곳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과거만 생각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오스만도 적함을 향해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지원 나온 독일 육군의 잔더스(Otto von Sanders)의 지휘 하에 저항에 나선 오스만은 연합군 함대가 해안포 사정권 내로 진입하자 반격을 개시하였다. 뜻밖의 반격에 연합국 함대는 당황하였지만 포탄을 주고받으면서도 해안포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다르다넬스 해협 부근에 집결한 연합군 함대. 영국 해군이 주축으로 구성된 함대는 육군의 상륙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독으로 갈리폴리 공격에 나섰다.)


영국은 육지의 해안 포대와 마치 함대함 포격전 같은 방식으로 대결을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였다. 해안 포대는 파괴되어도 복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전함은 침몰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서로 일대일로 포대를 교환하는 피해를 입었더라도 그에 따른 결과는 엄청났다. 일주일간의 포격전 끝에 양측의 손실은 커져갔지만 연합군 함대의 피해는 인내를 초월하는 수준까지 다다르게 되어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모했던 만용


이후 전력을 추슬러 3월 18일 영불 연합함대는 2차 공세에 나섰으나 작전에 투입 된 16척의 전투함 중에서 5척이 격침 또는 대파되는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이에 영국 해군 총사령관인 피셔(John Fisher)가 처칠의 무모한 도전에 대한 항의하는 표시로 스스로 사임하였고 만용을 부렸던 처칠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이것도 앞으로 있을 학살극의 그저 그런 서막일 뿐이었다.




(독일의 장갑순양함 룬(SMS Roon)에 장착되었던 210mm 구경의 거포가 오스만의 해안포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가 오스만에게 가장 커다란 위기의 순간이었다. 연합군 함대의 피해도 컸지만 이들로부터 엄청난 포격을 당한 갈리폴리 고지의 오스만군도 많은 피해를 입어서 만일 이때 연합군이 상륙하였다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칠의 만용으로 인하여 연합군은 해군만의 단독 작전으로 이번 침공전을 시도하였기에 막상 이곳에 상륙시켜 점령할 병력이 없었다.


결국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초전에 참담한 피해를 맞본 연합군은 3월 12일에서야 영국 중동 원정군 사령관 해밀턴(Ian Hamilton)에게 해군을 도와 갈리폴리에 전개된 오스만군을 제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육해군의 합동 작전은 당연히 옳은 선택이었으나 너무 늦었다. 주변에 당장 동원할 병력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호기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8일 격침 된 영국 전함 이리지스터블(HMS_Irresistible). 함대함 전투처럼 오스만군 해안 포대와 벌인 포격전의 결과는 영국 해군에게 더 치명적이었다.)


이렇게 6주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연합군의 다음 공격은 탄약과 병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오스만군이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초전에 갈리폴리를 방어한 오스만은 즉시 10만의 병력과 장비를 충원 받아 요새를 재건하고 방어선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겠다는 오스만의 의지는 실로 경이로웠다.




멀리서 온 병사들


영국은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 하여야 했으나 임기응변적인 처방으로 즉시 공격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이 상륙군으로 동원한 주력 부대는 저 멀리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파견한 ANZAC(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군단이었다. 이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집결하여 반복적인 상륙 훈련을 받았는데 아직까지 전선에 투입된 적이 없어서 실전 감각이 부족하였고 전쟁의 무서움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갈리폴리 해안 절벽에 설치된 ANZAC 소속의 뉴질랜드군 야전 캠프)


준비를 마친 연합군은 해밀턴 장군의 지휘 하에 드디어 1915년 4월 25일, 상륙을 개시하기로 하는데 계획은 의외로 단순하였다. 해안에 상륙한 전초 부대가 해안선에 교두보를 설치하면 후속하여 주력이 상륙하고 이후 해안가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언덕 위에 있는 오스만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작전이라는 것이 굳이 복잡할 필요는 없지만 영국의 계획은 너무 어설펐다.


그들은 언덕 위의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기에 상륙한 후 어떤 방법으로 그들보다 위치의 우위를 누리고 있는 오스만을 제압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교두보 확보가 가장 어려운 난관이라 판단하였다. 해안가에 확실한 거점을 확보하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런 안이함은 이후 해안가를 피로 물들이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격전의 현장 중 하나인 스핑크스 고지. 해안가에 상륙한 연합군은 오스만군이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고 내려다보는 이런 가파른 고지를 기어 올라가 점령하여야 했다. 하지만 돌격 부대를 엄호할 기갑 장비나 항공 전력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작 오스만은 적의 상륙을 해안가에서 막을 생각이 없었다. 가파른 고지 위에 자리 잡은 오스만군은 연합군이 숨이 턱이 찰 정도로 힘들게 기어서 고지 위로 다가오면 하나하나 차근차근 처단해 나갈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항공기와 기갑 부대를 이용한 돌파는 꿈에서나 가능하였기에 연합군이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은 바다 위에 있는 해군의 포격으로 탄막을 형성하여 보호를 받은 상태로 상륙군이 작전을 펼쳐야 했다.




잘못된 선택


1915년 4월 25일 06시, 갈리폴리 반도 인근에 집결한 연합군 함대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면서 오스만 요새 주변은 곧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다. 아무리 참호를 깊게 파고 준비하고 있다 해도 오스만군도 피해를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2월과 3월에 연이어 있었던 포격전에서 파괴되었던 진지들을 응급 복구한 상태였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불벼락을 완벽히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연합군은 탄막을 방패 삼아 능선의 부근까지 일사분란하게 진격하여야 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아주 사소한 실수가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다. 포격과 연이어 이어지는 보병의 돌격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곧바로 진행되어야 하는 작전이다. 포격의 효과가 사라질 만큼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아군이 돌격한다면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즉 적절한 시차가 작전의 성공을 담보하는 기초다.





그러려면 작전에 투입된 제 부대간의 철저한 준비와 통신망 확보가 필요하고 항상 시간이 엄수되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지만 연합군은 작전 시작 전에 시계를 맞춰보는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 화력을 지원할 해군과 돌격할 육군 지휘관의 시계가 몇분의 차이를 보였다는 자체가 승리를 바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포격 직후에 들이닥칠 것 같았던 연합군이 보이지 않자 오스만 진지는 신속히 보강되었다.


그때서야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는 연합군 모습이 포착되었고 이들은 준비를 마친 오스만군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일선 장교들은 작전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후방에 있던 지휘부는 돌격 명령만 남발하였고 결국 참호 밖으로 뛰어나간 수많은 병사들은 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하염없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1915년 4월 25일 새벽의 모습은 장장 8개월 간 계속될 갈리폴리에서 있었던 엄청난 피바다의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결과


엄밀히 말해 이런 피바다가 계속하여 연출된 책임은 연합군의 계속된 만용 때문이었다. 연합군은 비록 해안에 상륙은 하였지만 단지 그것이 끝이었다. 연합군은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하여 제자리에만 머물러야만 했다. 반면 오스만군은 영리하게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포격에도 불구하고 참호에 웅크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로 꼭꼭 숨어있다가 고지를 향해 기진맥진 기어올라오는 연합군을 향하여 기관총 세례를 날렸다.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ANZAC 병사들)


사실 오스만군도 연합군 못지않은 인명 피해를 보고 있었지만 인내심이 더 강하였다. 그들은 갈리폴리 해안을 연합군의 블랙홀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할 수 없던 영국은 패배를 인정하여야 했다. 하지만 무려 8개월 간 계속된 전투가 같은 모양으로 일관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오스만군이 잘 싸웠다기보다는 연합군이 무능하였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1916년 1월, 굴욕을 감수하고 연합군이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써 갈리폴리를 적신 피가 멈추었다. 결과는 너무 참혹하여 작전에 투입된 연합군 40만명 중 무려 25만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이는 영국군 전투사 최대의 치욕이었다. 만일 이런 피해를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어느 정도 위안도 거두었겠지만 연합군은 오스만 정복은 커녕 갈리폴리 해안 일대에서만 피를 흘리고 맴돌다가 사라져가기만 하였다.




(해상을 통해 후송 대기 중인 연합군 부상병들. 어쩌면 살아서 갈리폴리를 나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행운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는 만용으로 육군과의 공조도 없이 너무나 쉽게 전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나서야 겨우 육군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지만 결코 예전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작전 시간이나 통신처럼 가장 기초적인 협력도 하지 않고 그들은 따로따로 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무모한 돌격만 감행하여 갈리폴리 해안선을 피바다로 만드는데 주력하였을 뿐이었다.




의의


반면 승리를 거둔 오스만의 출혈도 대단하여 연합국과 비슷한 25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갈리폴리 지역은 초토화되었을 만큼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오스만은 갈리폴리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최고 지휘관부터 말단의 병사까지 일치단결하였다. 그들은 무서운 투혼을 보여 주었고 이것은 연합군이 적을 얕잡아보고 만용을 부려 대책 없이 전투를 개시하였던 것과는 진정으로 대비되는 진정한 용기의 표상이었다.




(갈리폴리 전투 종결 직후의 오스만군. 사실 이들도 연합군과 비슷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위정자의 무모한 판단으로 전쟁에 대책 없이 뛰어든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후 터키는 이때의 교훈을 결코 잊지 않아 2차 대전 당시에 추축국과 연합국의 계속적인 구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전쟁에 개입하는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였다. 또다시 남의 전쟁에 무턱대고 뛰어들 경우 겪을 수도 있는 고통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양국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였지만 너무나 달랐던 방법과 내용 그리고 그 참혹한 결과는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분명 양국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용기있는 행동을 겉으로는 보여주었지만, 막상 역사에 하나는 어이없는 만용으로 또 다른 하나는 진정한 용기로 기록되었다. 만용과 용기는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그로 인한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전투가 끝난 지 거의 60여년이 지난 1973년, 터키는 당시 적이었던 연합군 참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더 이상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전투가 펼쳐진 갈리폴리 지역을 추모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호주와 뉴질랜드인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만용을 반성하기 위하여 현재도 많이 찾는 굴욕의 성지가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첨부파일17스크랩 원문 : 이종격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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