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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의 북송 개봉성은 어떻게 무너졌을까?

A형 백수 2018. 6. 18. 11:10

[스크랩] 철벽의 북송 개봉성(開封城)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작성자:이영애씨작성시간:08:35  조회수: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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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의필승(正義必勝)

고대에 한 국가의 도성은 통치자의 거처이자 전체 국가의 심장이었다. 왕왕 철겹의 보호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벽의 성지(城池)에 인력과 물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약금탕(固若金湯)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서한의 도성 장안성은 고고발굴에 따르면, 성벽의 높이가 12미터에 달했고, 위의 너비는 10미터에 달했다. 성박에는 약 3미터의 호구(壕溝)가 있었다.

장안성은 효함(崤函,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한 자연방어벽이 있음에도 이렇게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는데, 지세가 장안보다 뛰어나지 못한 도성이라면 성지의 건설에서 훨씬 더 견고하게 만들어야 했다. 북송의 도성인 변량(지금의 개봉)이 바로 그러했다. 변량은 화북평원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시에 중원의 병장이 되는 '유운십육자'는 더 이상 중원왕조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직접 북방 요나라의 위협 아래에 놓여 있었다. 변방의 압력이 얼마나 클지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다.

955년, 후주의 세종 곽영이 즉위한 후, 변량성은 대규모로 축성공사에 들어간다. 당시 모두 10여만가량의 백성을 모아서 변량성을 축조한다. 외성(外城)을 축조할 때, 개봉현지의 토질이 연해서, 특별히 명해서 백리바깥의 호뢰관일대의 흙을 가져와서 성벽을 쌓는다. 이리하여 외성(外城), 내성(內城), 황성(皇城)의 삼중 성벽으로 구성된 변량성이 만들어진다. 이번 축조로 북송 '동경성'의 기초는 닦인 것이다. 고고발굴로 실증한 바에 따르면, 북송 변량성은 후주 변량성의 기초 위에서 확장축조된 것이다.

송나라가 건립된 후 변량성에 대하여 여러번의 확장과 증축을 이룬다. 그중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송신종 희녕8년(1075년)에 일어난다.



(청명상하도의 변량성)

이번 수축은 전후로 3년이 걸렸고, 만명이상의 인원이 동원된다. 성벽을 견고히 하는 외에 성벽에 적루(敵樓)를 만들고, 성문밖에는 옹성(瓮城)을 만든다. 적루와 옹성은 원래 변경의 성에만 두는 방어설비이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장안성에는 '옹문 및 수비를 위한 것을 두지 않았다.' 다만, 송나라는 요나라와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량성도 '변방성'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외성의 방어설비)
북송후기에 이르러, 변경성은 이미 성밖에 호구(護城河)를 갖추고, 호성하의 뒤에는 양마장(羊馬墻, 성벽과 호성허의 사이에 있는 성벽)을 둔다. 양마장의 뒤에는 외성이 있고, 외성의 뒤에는 내성이 있고, 내성의 뒤에는 황성이 있는, 5중방어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외에 성의 네 모서리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원풍7년, 송나라조정은 다시 변경성의 외성에 '봉축적단(封築敵團)"한다. 즉 외성의 네 모서리에 성루를 만들어 성벽의 네모서리의 방어역량을 강화한 것이다.




성문의 방어는 더욱 중요했다. 북송때 변경성에는 모두 12개의 성문(城門)과 9개의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그중 남훈문, 신정문, 북송문과 신봉구문은 어로(御路)가 통하므로 직문쌍중(直門雙重)(두 겹의 성문)으로 만든 외에 나머지 성문은 모조리 "옹성삼층(瓮城三層), 위곡개문(逶曲開門)했다. 변경성의 수문도 경비가 삼엄했다. 예를 들어, 변하의 동수문은 수문자체에 철갑으로 강물을 막는 외에 수문의 양측에 두 개의 '괴자성(拐子城)'을 두었다. 즉 두 개의 옹성을 두어서 만일 적군이 수문으로 진공하면 양측의 옹성에서 적을 협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1126년, 즉 정강원년, 금군(金軍)이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3겹의 성벽, 5겹이 방어체계를 갖춘 방어시설이 완비된 견고한 성이었다

금나라는 정강원년 정월초팔일에 개봉성아래에 도착한다. 그런데, 정월초엿새에 섬서통제관 오혁(吳革)은 이미 근왕군대를 이끌고 변경에 도착해 있었다.

금나라군대가 변경성에 도착한 후 변경의 서북쪽에 있는 모타강(牟陀岡)에 주둔한다. 그후에 변경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금나라군대가 먼저 공격한 것은 변경의 서수문(西水門)이다. '대형선박 수십척을 변하를 따라 내려왔다' 그 결과 수비장수 이강(李綱)이 2000명의 송나라군대를 이끌고 수문에 주둔하다가, 금군의 선박이 도착한 후에 긴 갈고리로 배를 강안에 끌어올리고, 투석기로 그것을 부수었다. 이렇게 금군의 제1차공격을 막아낸다.

금나라군대는 수문으로 공격하는 것이 어렵게 도자, 다시 방향을 바꾸어 산조문, 봉구문을 공격한다. 금나라군대는 운제(雲梯)를 만들어 공성했다. 그러나, 수비군은 활로 쏘아서 금군을 쓰러뜨린다. 송군은 활 이외에 활, 노, 돌, 투석기로 공격할 뿐아니라, 결사대를 내보내 금군을 습격한다. "운제 수십개를 불태우고, 십여명의 수급을 잘랐다." 금군은 한편으로 변경공격에 시간이 너무 걸릴 것같고, 다른 한편으로 각지의 근왕대군이 계속 변량성에 도착하여 수적으로 금군이 열세에 처하게 되자, 공성을 중지한다. 최종적으로 금군은 말로 겁을 준 후에 북방으로 철수한다. 제1차변경방어전은 이렇게 끝이 난다.

제1차변경방어전은 비록 금군의 철수로 끝이 났지만, 송나라조정내부의 혼란과 유약함은 금나라군대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금군의 제1차남하시, 송흠종은 변경을 벗어나서 도망치려고 한다. 중신 이강이 극력 만류하여 변경에 남았다. 근왕대군이 속속 도착한 후에는 송나라장수 요평중(姚平仲)이 금군을 기습할 계책을 내놓는다. 근왕대군이 도착하게 되면 금군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한 송흠종은 요평중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다만, 이번 야간기습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난다. 그러자 겁이 많은 송흠종은 바로 책임을 이강에게 떠넘겨 그를 파면시킨다. 그리고 사신을 금나라군영으로 보내어 사죄한다. 금나라군대가 철수한 후, 송흠종은 병마를 새로 수습하고 군대를 새로 편제하지 않고, 계속 사신을 금나라로 보내어 화의를 청하면서, 이강등 주전파의 책임을 추궁한다. 그들이 싸우자고 우기는 바람에 병사들이 많이 죽고, 재물도 많이 날렸다는 것이다.

정강원년 윤11월, 금군의 제1차 변경성 포위공격때, 금나라군대의 병력은 제1차보다 훨씬 늘어났다. 변경성 아래에 도착한 인원만 10만이 넘었다. 그외에 5만의 병력을 나누어서 동관(潼關)에 보내어 섬서의 근왕대군이 입관하는 것을 막았다.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송측은 이전보다 못했다. 송흠종을 위주로한 투항파의 '숙청'으로 변경의 병력은 비어 있었다. 겨우 7만의 정규군이다. 그런데 각로의 근왕군은 금군에 막히거나 다른 생각을 품고 오지 않았다. 금군이 도착했을 때, 변경성에 기본적으로 근왕부대는 도착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변경에 도착한 근왕군은 겨우 3만8천이었다.

이번 금군의 변경성에 대한 공격은 '환성열책(環城列柵)" 즉 성을 둘러싸고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량의 투석기, 아거(鵝車)등 공성기구를 가져온다. 금군은 주야로 40여일을 공성하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거)


그러나, 북송의 군신은 희망을 육정육갑신군(六丁六甲神軍)"에 걸고 있었다. 소위 '신병'은 신곤(神棍, 귀신을 부린다고 하는 사기꾼) 곽경(郭京)의 허풍이었다. 시정의 무리들을 임시로 끌어모아 만든 군대이다. 결국 송나라조정이 계속 재촉하자 "신병"은 성을 나가 전투를 벌이게 되나 즉시 궤멸한다. 그런데, 신병이 나간 성문이 하필이면 손상이 가장 컸던 선화문이었다. '신병'이 궤멸하여 흩어지자 금군은 그 기세를 틈타 진격하고, '신병'이 패퇴하는 혼란을 틈타, 개봉성의 외성벽을 장악한다. 이제 변경의 외성은 금군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외성은 그저 가장 바깥의 성벽이다. 금군은 아직도 두 개의 성벽을 더 무너뜨려야 했다. 그래야 완전히 변경을 점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흠종은 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저항의지를 상실한다. 이때부터 금나라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된다. 금나라의 여하한 요구도 다 들어준다. 결국 역사에서 말하는 '정강지치'라는 역사비극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송나라군이 야전에서는 금나라군대의 적수가 아니지만, 만일 투항파의 '숙청'이 없었더라면, 개봉성은 절대로 함락될 지경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봉성이 포위공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만일 북송의 군신이 무슨 '신병'놀이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외성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외성을 빼앗겼다고 하더라도, 만일 북송의 군신이 금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개봉은 절대 금나라사람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만일은 없다.

스크랩 원문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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