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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해상무역금지와 쇄국정책

A형 백수 2018. 6. 17. 11:08


[스크랩] 명나라 해상무역금지와 쇄국정책의 배경



작성자:이영애씨작성시간:08:36  조회수: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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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해금(海禁, 해상무역금지)와 쇄국정책을 시행한 배경은 명태조 주원장의 정치이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빈농출신의 황제이다. 그는 아주 원시적인 농업사회로 회귀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했다면, 아마도 그는 화폐와 상품거래도 금지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매 호의 사람들에게 현물세와 요역을 부과하였다. 

그런데, 이 요역은 어떤 경우 천리밖에서 징수한 수백개의 벽돌이나 수천장의 종이를 남경까지 운송하는 업무일 수도 있으며, 이런 임무를 맡은 가정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위소제를 시행하였는데, 관병들은 주둔지에서 스스로 경작해서 그것으로 생활했다. 농사꾼이면서 병사였다. 명태조 주원장은 매우 만족해 했다. 그는 백만병사를 기르지만 국가의 돈은 한푼도 쓰지 않는다고...

그러나 결과는 그저 백만의 집단농장의 농민을 기르는 것일 뿐이었다. 명나라 중후반기에는 위소의 군대는 보통농민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진다. 전투력이 전혀 없었다. 

더 우스운 일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가장 긴 남경성벽을 쌓을 때, 벽돌 하나하나는 전국각지에서 구운 다음에 운반해온 것이라는 점이다. 명태조는 아마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남경에 벽돌공장을 하나 만드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명태조 주원장의 생각이고 치국이념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명태조는 해상무역금지를 시행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국내무역마저도 금지하고자 하였는데, 대외무역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왜구를 방어한다는 것은 해상무역금지의 좋은 핑계거리였다.
 
명나라 황제가 딱 한번 공공연히 명태조의 해상무역금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있다. 바로 정화의 동남아원정이다. 동남아원정의 동기는 황제위를 찬탈당한 건문제 주윤문을 찾는 것이었다. 명나라 영락제는 건문제가 동남아에 도피한 것으로 의심했고, 추적과 수색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대명국의 위신을 선양하기 위한 정치적인 쇼였다. 정화의 동남아원정은 식민지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무역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단지 국력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이때문에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딛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영락제는 큰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돈을 계산하지는 않았었다. 이러한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조치는 영락제의 입맛에는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국력은 이런 걸 계속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영락제의 위세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단지 북경의 자금성의 삼대전이 금방 지어지자마다 번개를 맞아 불에탄 일을 기화로, 원정을 더 이상 못하게 하였을 뿐이다. 사실 일곱번의 원정이 아니라 칠십번의 원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동기와 방식이라면 중국에 해로움만 있지, 이로움은 없었을 것이고, 국력을 낭비하는 정치적인 행사일 뿐이었다.
 
명나라는 계속하여 재정곤란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적인 동원능력이 매우 약했다. 비록 명나라 말련에 이르러, 인구가 2억에 달하였지만, 가장 크게 동원한 병력은 송산회전때의 13만군대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이미 국력이 낭비되어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대의 동원능력은 단순히 군사상의 동원인원이 아니라, 군대가 원정하는 횟후와 거리도 관련된다. 많은 정도에서 동원되는 군대의 수량이 문제가 아니라, 물자조달이 이루어지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국가의 재정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명나라말에 군대의 최대동원수량이 왜 13만을 넘지 못하였는가? 이것은 바로 명나라의 재정이 근본적으로 이보다 많은 군대를 데리고 금주로 원정가도록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송산대전에서 명나라군대은 총사령관인 홍승주의 한걸음씩 나가는 전략을 위배하고 급히 금주에 접근하였다가 청나라군대에 보급선을 차단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전군이 전멸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후방에서의 보급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명사종 주유검은 속전속결을 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낭만주의자들은 군사사를 평가할 때 보는 것은 장판교의 조자룡이지만, 현실주의자들이 보는 것은 군수조달이다.
 
만일 명나라와 송나라의 정부재정수입을 비교한다면 명나라의 재정곤란은 더욱 명백하다. 명나라의 국력이 강성했던 가정제때 매년 중앙재정수입은 200만냥백은이었다. 만력초에 장거정의 개혁이 이루어진 후에는 400만여냥백은으로 늘어나고, 만력말년에는 요동의 만주가 일어나므로, 만주에 보내는 물자와 군사적인 필요에 따라, 520여만냥백은으로 늘었고, 이것으로 고정되게 된다. 

명나라말 숭정제때에는 요동의 전투가 더욱 격렬해지게 되어, 할 수없이 연못의 물을 퍼내서 고기를 잡는 식으로 "요향" "연향" "소향"등 소위 "삼향"을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하여 전국농민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계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전국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연수입은 2천여만냥백은이었다. 북송중후반의 매년 중앙재정수입은 육천만관에 이르렀는데, 남송때에는 매년 1억관을 초과하였고, 심지어 1억2천만관에 이른 적도 있었다.
 
송나라와 명나라 양황조는 100년이상 차이가 나므로, 직접 각자의 화폐로 비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에 아메리카대륙의 백은이 계속 중국에 유입되었고, 백은의 구매력은 명나라 중기이후에 대폭 하락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구매력평가로 비교한다면 송나라와 명나라의 정부재정수입은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인 쌀로 양국의 구매력을 비교하는 가장 좋은 척도가 될 것이다. 송나라때의 1석의 쌀은 400전 내지 1관(1000전)이었다. 높은 가격을 기준으로 1관이라고 친다. 명나라 중엽때의 쌀값은 낮게 잡아서 1석에 1냥백은이었다. 명나라의 1석은 송나라의 1.5배였다. 결국 명나라때의 재정수입인 최대치 2천만냥백은을 송나라의 관으로 환산하면, 3천만관이 된다. 

그런데, 남송의 1년 재정수입은 1억관이므로 명나라의 3.3배에 달하였다. 만일 명나라때 중앙재정수입이 비교적 높았던 만력년간의 520만냥백은으로 계산하면 송나라때는 명나라때의 10배이상이 된다. 왜 이렇게 차이가 크게 된 것일까?
 
명나라때의 경작면적은 송나라때보다 넓었다. 양식의 단위당 생산량도 송나라때보다 높았다. 그럼에도 명나라 말기의 "삼향"의 추가지수는 이미 농민의 감내한도를 넘어섰다. 농업은 완전히 파탄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두어봐야 겨우 2천여만냥백은밖에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단순히 농업에 의지하여서는 송나라때처럼 그렇게 높은 재정수입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송나라때의 중앙재정수입의 대부분은 농업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통계에 의하면 송희녕10년(1077년)에 중앙재정수입중 70%이상은 공상업에서 나왔다. 남송때 정부는 수출입무역에서 거두는 관세가 이미 중앙재정수입의 15%를 차지했고, 비농업 및 이에 기초하여 발달한 국내, 국제무역은 송나라때 중앙재정의 주요한 수익원이었다. 송나라와 명나라 두 황조의 재정수입이 이처럼 크게 차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해상무역금지 및 그 배후에 있는 경제정책과 건국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으로 말한다면, 송나라에 비하여 명나라는 경제체제상에서 많이 퇴보하게 된다.

스크랩 원문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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